December 3, 2013

2012년 2월 21일

이미 잔뜩 마셨는데도 취하진 않았는지 한잔을 더 따르고 선배는, 잠시 술잔을 바라보다 중얼거린다.

“그게 말야, 처음에는…”

그리고는 또 술잔을 한참이나 들여다보다가 힘없는 목소리로 계속 이야기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많이 잘못했지. 너도 알지? 내 성격이… 다른 사람하고 조금 다르잖아? 나 때문에 진짜 속상한 일도 많았을거고, 괴로운 일도, 슬픈 일도 많았을거야. 누구라도 우리를 봤다면 그렇게 말했겠지. 그때의 나는 사람을 대하는 법도 모르고 정말로 엉망이었으니까. 만약 연애의 신이 와서 판결을 내린다면 나는 진짜 사형…까지는 아니어도 20년형 이상을 받을 정도였을거야. 뭐, 그렇다고 이렇게 말하는 지금도 잘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래서 더 잘해주고 싶지만 잘 되지가 않더라고. 그래서 내가 가지고 있었던 감정은, 정말 좋아하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 그리고 더 잘해줘야겠다… 또 왜 생각한대로 되지 않는 것인지에 대한 안타까움, 그런 것들이 섞여있는 것 같은 그런 것이었어. 다 합쳐서 그게 내가 가지고있는 그녀를 향한 사랑이었던 것 같다. 그래서 목표도 자연스레 생기더라고. 지금은 당신이 나 때문에 고생했지만 나중에는 세상에서 제일 멋있는, 그리고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 그냥 그녀를 위한 가장 순수한 목표였던 것 같아.”

다시 술을 한잔 가득 채우고서는,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내가 너무 좋아하는 사람이라서 나는, 당연히 내 자존심 같은거에 신경을 쓰지 않을 줄 알았거든. 그렇잖아, 너같으면 정말 좋아하는 사람인데 괜한 자존심 같은걸 내세울래? 그녀를 향한 내 사랑이, 그딴 자존심보다 작을 수는 없는거잖아… 뭐 누구에게나 이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데 말야.”

선배가 이야기를 잠시 중단하고 술을 먹으려하자 나는 그만 마시라고 말하고 싶었다. 이미 내가 보기엔 주량 이상으로 마신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런 생각을 어찌 알았는지, 이게 마지막 잔이라고 나에게 말해주더니, 단숨에 술을 삼켰다.

“그런데 말야. 아니었어 그게… 자존심 말야. 자존심이 정말 중요하더라고. 모든 것이 서툴러 항상 나 때문에 모든 사건이 일어나게 되니 사과를 하고, 그게 자꾸 반복되다 보니, 어느새 우리 사이에서는 내가 사과만 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어. 항상 실망하는 표정의 그녀를 보니 더 움츠러들게 되고… 그래서 자존심을 버리게 되는 거야. 진심어린 사과를 위해서. 그런데 그게 가장 큰 실수였지. 일단 자존심이 없으면 상대에게 당당할 수가 없는거야. 어느새 나는 상대보다 한없이 작아져 버린 거지. 사랑만 알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게 느껴지는거야. 무얼 하든지 상대의 눈치를 보게 된다고. 그런 모습을 니 애인이 좋아할 수가 있을 것 같아? 절대 안돼, 그게 그렇게 될 수가 없다. 그러다가 결국은 자신도 깨닫게 돼. 너무 작아졌구나 나는. 나는 그녀와 이렇게나 차이가 나는 한심한 사람이었구나. 이러다 이 사람이 나를 싫어하게 되면 어쩌지? 아니, 어쩌면 벌써 나를 예전만큼 좋아하지 않는 것은 아닐까? 별별 생각들이 다 든단 말야.”

목소리는 점점 격해지고 있었다. 선배도 그것을 깨달았는지 헛기침을 한번 하고서는 다시 원래의 목소리로 이야기한다.

“그래서 더 자신을 낮추게 돼. 가장 사랑하는 그녀가 날 떠나면 안되니까. 그런데 난 이제는 전처럼 무작정 나 자신을 낮출 수가 없어. 자존심이 나에게 어떻게 다가오는지를 알아버렸단 말야. 하지만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자신을 낮춰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고, 자존심이 이제 뭔지 알고 있으면서도 그렇게 해야 하니 자신을 낮추면 낮출수록 점점 더 비참해지는거지… 자괴감이거나… 그런 것들… 자신을 더 낮춰야 관계가 이어진다는 것을… 결국 그녀와의 격차도 점점 더 멀어지는거야. 계속… 반복되는 것. 한없이 떨어지는 사람과 한없이 올라가는 사람. 너무 무례한 이야기를 해도, 나를 무시하는 이야기를 해도 그렇게 말하지 말아달라는 말을 못해. 나보다 어느새 훨씬 높은 곳에 올라가버린 사람이 말하는건데, 넌 그렇게 말을 할 수가 있겠어? 그러면서 점점 내 마음속에는 상처만 늘어가는거지. 그러다 결국 터지게 돼… 수습이 안 될 정도로. 여기까지 왔다면 이젠. 돌이킬 수 없는거지. 흐흐흐… 멍청하긴, 그냥 처음부터 이렇게 다가가지 않았다면 상처도 안받고 더 행복하게 지낼 수 있는건데, 그 말 한마디를 왜 못했을까… 나는 왜 자신을 낮추는 것만이 이 관계를 지속시키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걸까… 정말 나는 너무나 바보같다. 정말로… 그냥 말을 하면 됐을텐데.”

말하던 선배는 나를 보고 씩 웃더니 피곤한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도 고개를 들 줄을 몰랐다. 선배의 어깨는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냥 물끄러미 바라보다… 앞에 놓은 술 한잔을 마셨다.

그리고 몇 년이 지나 이제서야 나는, 이때 이 선배가 무슨 말을 하려했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마…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마 이런 비슷한 명언도 있었던 것 같았다.

생각해 보면 그 때는 단순히 선배의 일방적인 사랑이라고만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그건… 서로가 서로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었고, 사랑도 뭣도 아무것도 아니었던 것이다. 일방적인 희생이라고 해야 하나… 그걸 서로 사랑이라고 생각했을 뿐.

사실 써놓고 보니 별다를것 없고 새로울것 없는 내용이지만 왜 지금에 와서야 저 때 일이 생각나는지는 잘 모르겠다.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자격이 될런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난 이제 서로가 서로를 사랑한다는 것이 뭔지 알게 되었다… 적어도 희생만 있어서는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걸.